펙트-1930년대 조선인 엘리트 분포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근거

실상은 대단히 복잡 미묘하다. 근거 자료. http://berkeleyopinion.com/99   일본 육군 사관학교나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는 일본인들에게도 아주 들어 가기 힘든 학교였죠. 동경 제국대학 수준이었다 합니다. 특히, 돈 없는 수재들에게는 학자금 필요 없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출세가 보장되는 사관학교는 가난한 뭇 청소년들의 꿈 이었습니다. (특히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섯부른 왜놈들을 누르는 길은 육사에 들어 가 임관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는 계급사회기때문에 민족 차별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기 때문이죠) 일제는 군 장교 엘리트 코스인 육사 입교에 대해 조선인에게 어떤 면에서는 특혜와 차별을 했습니다.(해군병 학교에는 끝까지 조선인의 입교를 허락치 않았습니다만) 특혜란, 일제가 한일 합방시 한국 무관학교(사관학교)를 폐교하면서 그 재학생을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편입시켜 주는 특혜를 주었습니다. 이 특혜를 받아 일본 육사에 편입해 들어간 사람들이 노백린, 어담, 유동열(유재흥의 부) 등입니다.(대략 23명) 한일 합방후 특혜조치가 없어진 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있게 되고 아주 일부만 입학을 허용했는데 이 시기에 입교한 사람들은 김광서(원조 김일성이란 설이 있음), 홍사익, 이청천, 이응준, 김석원 등입니다. 다음은 일제의 군비확장기에 한국인에게도 문호를 어느 정도 개방한 시기에 입교하는 부류입니다. 채병덕, 이종찬, 신응균 이용문, 지인태(비행장교로 노몽한 전투에서 전사) 등입니다. 마지막은 중일전쟁 후반기 – 태평양전쟁기간 중 일본 육사 입교자 수가 격증하면서 많은 한국인 들이 입교했습니다. 김정렬, 유재흥, 이형근, 박임항, 박정희, 이한림, 정내혁 등입니다. 잘 알다 시피 일본 육사는 예과 2년을 수료 후 본과인 육사(항공병과의 경우 항공사관학교로)에 진학합니다. 만주 군관학교는 2년제이므로 성적 우수자는 일본 예과 수료자와 동등하게 취급, 본과인 육사에 진학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정일권, 강문봉, 박정희, 이한림등이 있습니다. 한편, 중국 국민당(장개석) 정부도 군관학교를 설립 , 많은 장교(군관)을 양성했는데 중국의 경우는 적게는 6개월(심지어 3개월 코스도), 많게는 1년 이내의 단기 장교 양성학교였습니다. 중국 군관학교 출신 조선인의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김무정(8로군 포병단장, 한국전쟁시 2군단장, 김일성에 의해 숙청됨), 이청천, 이범석,김홍일, 등 입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창군시 군대 경력자들의 배경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일본계 – 육사파, 만군(만주국군)파, 학병파, 지원병파, 중국계 광복군 계 – 거의 대부분 중국계 그러나 군사 지식이나 능력의 경우, 일본 육사계가 단연 우수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광복군계(중국계)가 이를 시샘하고 정통성을 주장한 것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 일본 육사계는 군 지휘관이란 일종의 프로페셔날 성격이므로 무능하고 큰 소리나 치는 광복군계나 속성 양성소 출신인 일군 학도병계, 지원병계를 내심 경멸하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진짜 김일성을 탐구해보자.———————————————————————————– – – 김경천 (1888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동: 둘러보기, 찾기 김경천출생1888년 6월 5일 대한제국 함경남도 북청사망1942년 1월 2일 소비에트 연방사인병사국적 대한제국학력일본육군사관학교직업독립운동가, 군인김경천(金擎天, 1888년 6월 5일 ~ 1942년 1월 2일)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일제 강점기에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이다. 본명은 김광서, 별칭은 조선의 나폴레옹[1]이다. 본관은 시흥이다.목차 [숨기기] 1 생애 2 사후 3 본관 4 같이 보기 5 주석 6 참고자료[편집] 생애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현충(金顯忠), 김광서(金光瑞)이며, 후에 신팔균,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아버지인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1911년 일본 육사를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그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단장 김규면)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사령관 김규식)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2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1937년 스탈린 정권 하에서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39년 재차 체포되어 두 차례 복역했다. 두 번째 복역 중에 유배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편집] 사후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교로서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홀연히 망명한 뒤 시베리아 일대에서 ‘김장군’으로 불리며 유명해진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김경천은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일찍부터 ‘장군’으로 불린 인물이기에, 김일성이 그의 가명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편집] 본관김경천은 1916년 10월 10일에 자신의 본관을 시흥(始興) 김씨로 정정하였다. 시흥 김씨는 인지도가 높은 본관이 아닌데, 김경천 자신이 본관을 정정하였다면 본관은 시흥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시흥 김씨 연원에는 김지(金智)가 평안도 대동군(大同郡) 추울미(秋蔚美)에 살면서 세계를 계승하였고, 그의 아들 김효성(金孝成)이 조선조에서 훈도(訓導)를 지내 가문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어 북한 지역에 세거한 기록이 있다.일부에서는 김경천이 본관을 시흥으로 정정한것이 독립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개연성이 떨어지는 논리이다. 한국의 독립과 김경천의 본관은 상관관계가 없고, 본관의 정정은 오류가 없는 경우에는 이루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경천의 본관으로 잘못 알려진 김해는 3가지(선김, 후김, 일본) 계통으로 나뉘는데, 어는 계통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김해 김씨는 김경천과 관련한 세보을 증빙하지 못하였다.[편집] 같이 보기일본육군사관학교 김일성 가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