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의 최후는 어땠어요? 명량영화 왜곡과 진실^^

배설의 최후는 어땠어, 명량영화 왜곡과 진실
배설장군의 최후, ‘배설이 있다.’
裵楔 “ベッセル   いたい….풍신수길은 절명순간 왜 배설을 불렀나요….^^
배설장군은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배설장군이 도망자,  비겁자 였거나,  역모가 있었다면,  배설장군의 아들 4형제에게 조정에서 관직을 주었겠냐구요,  장남은 끝내 아버지의 역모 연루에 벼슬을 사양했으나. 죽은후 벼슬을 제수 받았구요, 그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받은 고위관직은 다 셀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얘기하고자 함은  역적이라든 배설의 아들 전부가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죠,아니 손자들은 영천현령 좌승지(승지 :청와대근무)….

비교가 적절하지는 않으나. 이순신장군님이 당대성웅이시니 이에 비교를 해보죠,  조선 후기에 문과 급제1명이 있다지요? 1명이 있었네요^^ 죄송! 무관은 좀 있답니다.   훌륭한 이순신장군님 까려고 하는건 절대아닙니다. ^^ 굳 모닝~ 궅이브닝
 
 
배설장군이 역모죄로 추포되어 가족도 장례를 겁나서 못하는데요,  경삼감사 한준겸이 현직파직뿐 아니라 3족을 멸할 역적이라는 배설장군을 군졸을 보내서 장례를 치릅니다. 사대부의 장산을 빼앗아 묘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파직당합니다.
 
얼마나 인품이 좋았으면 자신에 가족목숨까지 걸고 경삼감사까지 내려놓은 장례입니다. 배설이 어떤 인물인가 추정되지요, 미관말직도 중요히 여기든 시절에 역모로 몰린 장수를 장례지냅니다. 관포지교나 금란지교니 하지만 배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인물이고 시기 또한 대단히 받은 장수였습니다.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ㅡ배설ㅡ
 

배설은 자신이 쌓은 공이 태산 같아서 죽게 되는데, 
이순신장군 난중일기 때문이 아니구요,
또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 명성이 워낙 높아서 백성들이 왕보다 사랑하든 장군으로 ‘강강술래’를 하면서 까지 도와주는 백성들로 인해 명망 때문에 죽었습니다.  배설장군 스스로도 누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문과를 통과할 만한 실력에도 일체 글을 만기지 않고 패장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정중신들과 사관 문신들은 왜란이 터지자 도망만 다녔고, 따라서 비겁한 조정에 비겁한 왕조, 비겁한 신하들이 빠글 빠글한 조선에서 누구도 배설장군을 비난할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설장군은 군부내 알력으로 실각했을 뿐 도망칠이유가없었죠,  장군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도망을 칩니까, 온통 적군이 빠글 빠글한 육지 어디서 쉴 수 있냐구요?  이순신 장군님 가족들이 학살된 것 아시죠?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당시에 장수는 사표내면 그만이였구요,  수군에서  공문받아 귀향했으면  탈영이란게 성립할 수 없죠,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수없이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거침없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1592년 4월 27일 왜군 대장 흑전장전은 부산을 거쳐 거침없이 성주성을 점령 목사 제말을 죽이고 찬희를 성주목사로 임명하는데 맞서 성주성을 탈환하여 지키므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습니다. 배덕문 의병장을 따라 배설은 임진왜란시 중부군 사령관 흑전구침의 목을 베고 풍신수길이 지휘권으로 하사한 금부채와 대장칼 2개를 빼앗아 성주성 무혈입성을 성공시켰고 이 무공으로 배설은 합천군수가 됩니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13일 상륙을 마친 왜군들은  14일 부산진성을 침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 송상현은 15일 전투에서 두시간만에 중과부주적으로 전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이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부대는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5진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부대는 병력2만5천으로 제4진에 뒤 이어 상륙 한 후,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진출로를 따라 북상 하면서후방 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제6진 병력만5천7백명, 제7진 병력 3만명, 제8진 병력 1만명, 제9진 병력 1만1천5백명이 연이어 상륙 한 후방 부대 역할을 하거나 한양으로 이동 하였다. 그리고 1만2천명의 에비 부대가 투입 되어 주로 후방 경계를 담당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은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배설장군의 누명과 참수,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이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준겸 경상 감사가 병졸들을 보내 장례를 치러주고, 묘지를 만들고,  가족을도 나서지 못하는 역모로 몰려 참수되는 죄인을 경상감사가 장례를 치릅니다.   
그것도 보통사람이 아닌 어마 어마한 경상감사,  3족이 멸할 수 있는 장례를 치르고. 사대부의 땅을 빼앗아 묘지를 쓴다. 그리고 파직됩니다. 요즘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없죠.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으면 경상감사를 포기하고 역모죄로 처벌 받는 죄인을 호상하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봐도 배설이 억울히 죽은 것임을 알수 있고, 비겁자니 도망자니 하는 것을 이해할 만합니다. 현직 경상감사가 도망자를 위해 그래할리 있겠냐구요?
 
경상 남북도 다합친 전권을 가진 경상감사가 어떤 자리인데요
역모죄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슬쩍 묻어만 줘도 대단 한 것이라 할 것인데요,  동인조정과 선조임금에게 안된다는 것이죠,

 
백마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죽은 이를 위해 경상감사까지 그만두고 역모죄인이 될 수 있는 장례를 치룹니다. 실제 파직됩니다. 파직된지 수 년 후 한준겸은 인조반정(손자) 거사에 성공합니다. 한준겸(韓浚謙, 1557년 ~ 1627년)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로 인조의 장인이다. (출처:백과사전)

한준겸은 한 때 전주로 도피하여 배설장군을 회상하면서 복수를 꿈꿉니다. 그리고 구굉, 구인후 , 최내길, 등이 이흥립과 거사가 성공합니다. 그리고 동인들은 대거 하루에  40명이 참수 되고 귀양 만도 200명 이상이 가게 되는 옥사가 읽어나죠.   결국 동인들도 그래 비참히 죽고 쫒겨나고 맙니다. 역사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죠,ㅡㅡㅡㅡ ^^유성룡 권율 다 날라갑니다. ^^
 
 

정종호는 장군을 삼달덕(三達德)을 구비한 인물. 그는 “ 옛 부터 인신(人臣)이 국가를 위하여 큰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지혜(知慧)가 있은 연후에 가히 대책을 세울 수 있고, 그 인(仁)이 있는 연후에 가히 대중을 복종시키고, 그 용기(勇氣)가 있는 연후에 가히 적을 칠 수 있으니 장군은 그것이 겸비한 사람이 장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나아가 “장군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먼저 여러 전투에서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았던 점이 지(智)이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보고 혜창(惠倉)을 창립한 것은 인(仁)이며,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용(勇)이 였다”
 
 
 
 
 
 
 ‘만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고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려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  
 
조선을 위해 배설장군만은 살려두라고 외친 경상감사 한준겸의 눈물처럼,  병자호란에 조선은 무릅을 꿀어야 했고,  조선은 울었죠!!^^
 적군의 목을 벨능력없으면, 다 그러하듯이 ‘전하 목을 치시옵소서’로 나라가 지켜지지 않죠^^
능력 없음 군기 빡세고 망한다는 말 그대로죠?  
 
 
 
 
 
 
 
*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초나흘(병오)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배설)가 활쏘기를 청하므로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기)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배설이 활쏘기를 청하니, 배를 타고 조방장 둘을 데리고 가서 활쏘기를 시켰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배설이 이순신 장군에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활을 가지고 오라고 하니 조방장들에게 활을 들려 술취한 것이죠^^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케이넌일기. 루이프로스일기, 가토, 요시아키 기타)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기를 당시가 아닌 훗날 적었다는 것 자체로 이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훗날 공적 다툼 사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1,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2,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은 현무공실기에서
 안위가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잡아다가 참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었을까? 이틀후 다시 ‘도망쳤다’고 적고 있는데 이 8월30일자 일기는 처음 쓴 1책에는 없었으나 10월 8일 이후 다시쓴 2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후세와 오늘날 필주자들은 이러한 날조된 기록을 가지고 배설장군을 비겁하고 도망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11월 3일자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때 ‘배설은 이미 성주 본가로 갔는데’라고 말하였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배설은 노량해전에서 동생 배즙장군이 전사하기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책임이 선조실록 정유년 7월22일에는 권율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다음 8월 5일자에서는 앞전에 올라온 장계들의 내용은 모두 무시하고 권율이 다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의하여 배설과 배흥립에게 책임이 물어진다.
 
이 자리에서 배흥립은 바로 군율로 처리하고 배설을 바다에서 주사로 영솔하고 있으니 훗날 처치하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군율로 처하라고 한 배흥립은 이순신이 배설의 부대 군권을 쟁탈할때 이순신과 늘 함께 하고 있었던 내용이 난중일기에 배동지, 배백기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후 배흥립은 이 일로 처벌 받지 않았다.
 
물론 배설도 칠천량전투의 책임으로 처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배설에 대한 탄핵은 단지 당시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장인이며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함 이었고 배설을 두려워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3, 배설은 왜 바로 체포되지 않았는가?
칠천량 전투에 패전책임 으로는 배설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덧붙여서 10월 11일 선조실록에 두 번 도망친 죄인으로 만들어 탄핵을 한다. 이에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체포하러 이순신에게 갔다. 그리고 정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성주로 체포를 하러 갔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길원이 이순신을 만나서 당시의 사정을 당연히 파악 하였을 것이다. 지금 필주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 처럼 배설이 전쟁중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쳤다면 바로 이길원은 배설을 체포하여 처벌 받도록 하였을 것이고 처형후 선조에 의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책록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배설은 그간의 두 번이나 도망자로 만들어서 탄핵을 했지만 이것으로는 죽일 죄목이 되지를 못한다. 전쟁에서 많은 용장들이 죽어서 이제 배설이 재기용되는 일만 남았다. 배설을 모함 하였던 조정대신들은 배설이 군권을 장악하는 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8.12.23)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뒤 국내 변란을 우려하여 배설을 탄핵 – 이순신은 죽고 없는 마당에 배설의 재기용에 따른 불안감을 국내 변란으로 무함하여 탄핵함. 이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 배설의 용맹과 지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배설이 재기용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히 변란으로 받아들이게 됨.
배설장군을 모함했던 정인홍은 그후 수차례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88세에 참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을 탄핵했던 홍여순은 훗날 1609년 귀양지 진도에서 백성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그러나 배설장군은 1605년 4월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어 억울한 죽음이 신원 되었다.”

4,현무공실기에 나오는 교서 내용(참고자료)
“교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유서, 네가 한지방을 수임하니 책임이 중하다. 무릇 군사를 발하여 규율에 응하여 백성을 편케하고 적을 막는데 일응 평상사는 스스로 정한 법이 있거니와 혹 내가 너에게 독단처사 하는 권한을 줄 때에는 밀부(密簿)가 아니거든 시행치 말 것이며 또 의외의 간모를 예방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비상의 명이 있을 때 에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의심이 없는 년후에 마땅히 명령을 집행해야 하겠기에 압 제 二十六부를 주노니 너는 받으라 그러므로 이르노라.”(만력26년 선조31년 12월 29일)

현무공실기 행술편에 나오는 배설관련 기사
“명량의 승첩이 반은 구선의 힘이라 대저 명량은 이 강분의 요해처라 그 험함이 구당과 염려와 같으니 뉘 능히 깊음을 알랴 오직 공과 다만 배설이 알기를 가장 자세한지라 크게 전함을 지어 주야로 역사를 동독하여 날이 못해서 지어놓고 배설과 더불어 이공을 진도에 모여 구책을 정하고 가만히 철쇠로써 명량을 횡단해서 우리배가 올라오면 가만히 철쇠를 들어 남은배가 차례로 나오게 하였다”

“한산에 패보가 이르기에 미쳐 조정과 들이 진동하여 놀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르되 이는 원균의 죄니 오직 마땅히 이순신을 이르켜 통제사를 삼으시오. 상이 좆으사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임소에 가게하니 이에 순신이 자이로 행하여 진도에 들어가니 사민들이 바라보고 기뻐 이르되 우리 공이 오셨다하여 각각 병갑을 가져다 따르고 배설 및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남은 군사로써 와서 모으니 배는 겨우 십이척이요 양식과 기계는 탕진 된지라 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부르고 배를 장식하니 때에 적은 이미 호남에 찼으되 순신은 홀로 창잔된 남은 군사로 의지할바 없어 해중에 준순하니 보는자 위태이 여기는지라 배설 이르되 일이 급한지라 배를 놓고 육지로 오르는 것 같지 못하오. 순신이 불청하고 조정이 주사가 고약(미약함)함을 근심하여 또한 군사를 옮겨 육전하게하니 순신이 계하여 이르되 적이 감히 곳 돌진하는 못하는 것은 실로 주사가 막으므로 써라 한번 육지에 올은즉 적이 반드시 서해를 말미암어 한강에 도달함이 다만 한 배를 의지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 하는 바라 이제 신이 오히려 전선 십이척이 있으니….”

배즙 경상수군 전함과 무기비교,

일본 쿠키 요시타카의 함선은 칠병포(七兵砲) 포알이 주먹만하고 약 200미터를 날아가는 함포로 배의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배즙 장군의 경상 수군은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갑판 내에 장착하여 1킬로 이상 사거리의 칠병포알의 10배 정도의 탄환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사명대사가 금오 산성을 수히하고 전국의 사찰에서 놋그릇을 모아 금오산성 대장간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수군 중에 유일하게 쿠키 요시타카의 부대는 칠병포(七兵砲)를 장착하고 일본 최강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기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쿠키 요시타카에 많은 기대를 하였엇다.

“이번에는 조선 수군을 아주 요절내고 말 테다.” 쿠키 요시타카는 부산 상륙 전에 조선의 전함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일본의 우수한 전함을 맛 보여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의 수군은 바다를 지키지 않았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난중일기를 집필한 것이다.
조선군이 응대해주지 않자 쿠키 요시타카는 매우 실망하여 대장선 약 12척을 거느리고 약 600여 척의 전함들과 함께 웅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는 맞선 원균이란 장수 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원균은 충청병마절도사로 옮겨 간 이후 바다가 비어있었다.
“쳇 나의 이렇게 훌륭한 전함을 기동조차 해보지 못 하다니.” (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명량 해전에 투입된 전함 12척의  개요

 임진왜란이란 전투의 격전지 전장에서 배설 장군은 개눈 감추듯이 전함 12척 그것도 200명이 승선하는 오늘날 항공 모함에 해당하는 전함 12척을 감추었다는 세계가 놀랄 마술사의 대열에 올랐는데, 배설 장군의 명령으로 조연을 하게된 배즙 장군이
세계 역사상 전무 후무한 전함 12척과 약 2000~1000명의 병력을 감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배설장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중국대륙 한반도 수만년 역사에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작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배즙 장군이었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을 하고 판옥선을 장작귀선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성공함,(전라수사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실기)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기에 나무로 만든 전함은 팔 수 없음,)

기록을 보면 원균 이순신 최호 이억기 김억추 조선의 장수들은 용감했고, 잘 싸운 것을 알 수 있다. 토요토미의 워낙 대군이 밀어 닦쳐 고전한 것일뿐, 문제는 일본은 임진왜란을 실패로 생각하고 약 300년간 군사 무기와 기술을 끝임없이 개발하고 수입한데 비해 조선은 임진왜란을 방어한데 자만하여 자기 민족을 탄압하고 군사적 무기의 발달에 소홀히 한점을 반복해서는 안된다.